본문 바로가기
충청&대전

영동국악체험촌 소리창조관에서 국악기 체험을 하다

by 오향란 2017. 6. 20.
728x90
반응형

 

 

옥천군 이원면과 경계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버스 정류소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도로명 국악로에 자리하고 있는 난계국악박물관(개관 2000.9.23)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난계 박연 선생의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국악관련 박물관으로서 산하에 난계국악체험전수관(2006), 영동국악체럼촌 등을 두고 있다. 이중 영동국악체험촌은 우리의 전통음악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체험할 수 있는 체험·체류형 국악타운으로 우리소리관, 국악누리관, 소리창조관, 천고각 등 4개 동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난계국악박물관 인근에는 난계생가와 난계묘, 국악기제작촌,·난계국악당 등이 있다.

 

 

 

난계국악박물관 영동국악체험촌

 

 

 

 

 

 

 

 

 

소리창조관, 장구 및 북 꽹과리 체험실

쿵따다 쿵쿵따~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도 졌다.

그 중, 장구 치기 체험은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소리창조관, 가야금 체험

뜯고 튕기고... 어설프게나마 단숨에 쉬운 동요 한 곡을 배웠다.

 

 

 

 

 

 

용(龍) 문양을 두른 천고(天鼓)

천고는 2010년 8월 제작되었으며, 지름 5.5m, 길이 6m, 무게 7톤의 세계 최대 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천고를 만드는데 소나무 원목 24,000재(15톤 트럭 4대 분량) 그리고 소 40여 마리의 가죽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 천고 이야기

 조선 초, 영동군 삼천면 고당리에 한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에게는 세 명의 손자가 있었는 데, 그 중 영특하기로 소문난 손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과거시험 준비에 열중했다. 노파는 그런 손자를 위해 밤마다 뒤뜰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다. 치성을 드린지 백일 째 되던 날 밤, 잠을 자는 데 하늘이 활짝 열리고 구척장신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나 큰북을 마당 한가운데 내려놓고 "나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이다, 그대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옥황상제께서 천고를 내려주셨으니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천고를 세 번 두드려라 그리하면 소원을 이루리라" 하였다. 노파는 신령이 건네준 북채로 커다란 북을 힘껏 정성을 다해 세 번을 두드렸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며칠 후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났던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였는 데, 바로 난계 박연이었다.

 

 

 

소원을 빌며 천고를 힘차게 세 번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청명하고 웅장한 소리가 하늘에 닿으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는 아니겠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세계 최대의 천고를 힘껏 쳐보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천고 체험비는 삼천원으로 북채를 이용해 세 번 칠 수 있다.

 

 

 

난계국악박물관은 관람없이 패스하고 옥계폭포로 달려가고 있다.

 

 

 

여행일 2017.06.18.

 

   조선시대 국악의 거성 박연(1378~1458)

 난계 박연은 1378년(고려 우왕 4)에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박연은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묘를 6년하여 1402년(조선 태종 2)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하였다. 세종이 대군시절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세종을 가르쳤고, 집현전 교리를 거쳐 지평 문학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악사를 맡아보았다. 1427년(세종 9)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실행케 했으며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아 아악에 종사하였으며, 공조참의 중추원 첨지사를 거쳐 중추원 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 중추원 부사를 역임하다기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가 처형되었으나 박연은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러나 자손들의 안위를 위해 고산에 안치되기를 자원하였다가 1458년 2월 2일 풀려나 생가로 돌아왔으며, 48일 만인 1458년 3월 23일 사망했다. 난계 박연은 특히 대금을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聖)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