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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랑이 빚어낸 찬란한 무덤 타지마할

by 오향란 2016.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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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라의 숙박 호텔 입구에 서 있는 인도인 아제이 가이드

 

 

↓ 호텔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타지마할 갈 준비를 하고 있다.

 

 

↓ 타지마할 인근 길이다.

 

 

 

 

▼ 타지마할 도착

타지마할 입장은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첫 번째 문인 매표소에 비교적 일찍왔다고 생각했는데, 매표소 앞은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긴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 첫 번째 매표소 문과 두 번째 타지마할 정문 사이에 있는 정원의 풍경이다.

 

 

 

타지마할 정문

타지마할 정문은 안과 밖이 똑같은 모습이다. 앞면에 푸른 잔디가 없다면 안과 밖 구별이 어려울 정도다.

 

↑ 타지마할 밖에서 본 정문 & ↓ 타지마할 안에서 본 정문

 

 

정문을 통과하면 일직선으로 벋은 긴 수로 끝에 순백의 대리석 타지마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타지마할 네 모퉁이에 첨탑을 배치해 동서남북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도록 했다. 네 개의 첨탑 중 세 개가 보수 중이다.

 

 

 

타지마할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한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인공으로 만든 7m 높이의 기단 위에 건설되었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바깥쪽으로 조금 휘어지게 설계했는데 결과적으로 지진에 견디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 신발을 벗어야 타지마할 관람이 이루어진다.

관광객에게는 천으로 된 덧신이 제공된다. 덧신을 신발 위에 신고 계단으로 이어진 타지마할에 오르고 있다.

 

 

타지마할에는 값비싼 보석들이 장식되어 아름다움이 더없었는데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과 도굴꾼들에 의해 도난 당했다.

영국은 거대한 돔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떼어내고 그 자리를 구리로 덮었으며, 은으로 된 출입문을 놓여 가져가고 대신 청동문을 달았다.

독립국이 된 뒤 타지마할은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도 도난 당한 많은 보석들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박물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하얀 대리석에 반복적으로 새겨진 문양들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찬연함을 더하는 것 같다.

 

 

 

↓ 타지마할 1층에 두 개의 대리석 관이 놓여져 있는데 유해가 없는 가짜이고, 진짜 샤 자한 왕과 뭄타즈 마할 왕비의 유골은 지하 묘실에 안장되어 있다.

 

 

 

 

↓ 타지마할을 중심으로 네 모퉁이에 세워진 네 개의 첨탑은 50m 높이다.

 

 

타지마할 뒤로는 자무나 강이 흐르고 있다.

샤 자한 왕이 타지마할과 마주보는 자무나 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짓고 구름다리로 연결하려고 했다는 말이 있다.

그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자무나 강 건너편에서 건물의 기단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영빈관 광장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동쪽과 서쪽에 건설된 영빈관과 모스크는 타지마할을 돋보이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타지마할 동쪽에 건설되어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타지마할 서쪽에 건설되어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 타지마할 정문 옆으로 이어진 회랑에는 고적과 유적 등의 사진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행일 2016.03.06.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이 테칸 지역으로 원정을 떠날 때 세 번째 아내 뭄타즈 마할도 함께 했다.

왕비가 전쟁터까지 동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뭄타즈 마할은 아내인 동시에 정치적 조언자였기 때문이었다.

샤 자한 왕이 데칸 고원에서 전쟁 중일 때 막사에서 뭄타즈 마할이 열네 번째 아기(딸)를 낳다 병을 얻었다.

샤 자한 왕이 막사로 달려왔을 때는 뭄타즈 마할은 이미 죽음에 당도해 있었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뭄타즈 마할은 14세에 결혼하여 19년 동안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여덟은 출산할 때 또는 유아 시절 사망했다.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비 뭄타즈 마할을 심히 사랑했던 샤 자한 왕은 아그라의 남쪽 자무나 강가에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이란을 비롯한 외국의 건축가와 전문기술자들을 동원하였고, 순백의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자국에서 조달했지만

고급 장식재와 보석들은 터기, 티베트, 미얀마, 중국, 이집트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하는 등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

샤 자한은 22년(1632~1653) 동안 건설한 아름다운 타지마할에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 뭄타즈 마할의 유해를 안치했으나

10년 뒤인 1658년 첫 번째 왕비 소생인 아우랑제브(1658~1707)에게 황제 자리를 침탈당하고 아그라 요새에 유폐되었다.

 

샤 자한은 다행히 2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에서 타지마할을 볼 수 있었고, 사랑하는 뭄타즈 마할을 그리다 생을 마감했다.

아우랑제브 황제는 아버지 샤 자한이 사망하자 시신을 뭄타즈 마할이 잠들어 있는 지하 묘소에 안장했고

샤 자한은 죽어서 생애 몹시 사랑했던 아내 뭄타즈 마할 곁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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