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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무굴제국의 14년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

by 오향란 2016.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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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

무굴제국 악바르 대제는 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학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이 컸다.

그때 당시 수많은 기적으로 민중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 수피의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로부터 세 명의 아들을 둘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힌두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 '조다 바이'에게서 첫번 째 아들(훗날 자항기르 황제)을 본다.

악바르 대제는 고마움에 예언자가 살던 아그라에서 37km 떨어진 언덕에 수도를 세우고 '파테푸르 시크리'라 명명한다.

그러나 파테푸르 시크리는 1571년부터 1585년까지 불과 14년 동안만 수도로서의 역활을 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수자원 부족이었는데, 방도를 찾지 못하자 무굴제국은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다시 아그라로 되돌아간다.

이후 파테푸르 시크리는 1892년 영국의 고고학 탐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을 버려져 있었으며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 디완이 카스(Diwan-i-Khas)

종교 대통합을 추진했던 악바르 황제가 4대 종교 지도자들과 국사를 논했던 곳이다.

악바르 황제는 종교적으로 이슬람교 이외에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 디완이 카스 내부 중심에 있는 이 기둥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자이나교, 시크교를 상징하는 각각의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중심 기둥은 2층 상단 중앙에 정자를 설치하고 중앙 정자를 중심으로 들보 형태의 사방 통로를 내고 그 끝에 정자를 설치했다.

중앙의 정자는 악바르 황제의 자리었을 것이고, 사방 끝에 있는 네 개의 정자는 4대 종교 지도자들의 자리었을 것이다.

 

 

 

 

파테푸르 시크리성은 총 길이 3km, 폭 1km의 규모이며 크게 왕궁과 사원 구역으로 나뉜다.

 

 

 

 

 

 

▼ 판치 마할(5층 누각)

 

 

 

 

 

 

 

악바르 황제의 부인 마리암 왕비 초상화

 

 

 

 

 

 

 

궁녀들이 거주했던 조다 바이 궁전

 

 

 

외부와 연결된 이완이 암  

 

 

 

 

 

단장되어 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성을 나와 방치된 파테푸르 시크리의 성곽 구역을 지나고 있다.

 

처참하게 무너져 폐허가 된 방대한 성곽 구역은 머지 않아 돌더미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끝간데 없는 폐허의 성곽, 복원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파테푸르 시크리성 주변에는 일국의 수도였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작은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여행일 2016.03.06.

 

 

파테푸르 시크리성은 높이 약 54m의 승리의 문을 위주로, 다양한 궁전들이 붉은 사암으로 건설되어 졌는데

악바르 대제에게 아들을 얻는다고 예언했던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은 하얀 대리석으로 건설되었다.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하얀 무덤은 지금도 아들을 소원하는 인도인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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