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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2) 북포루, 북서포루, 북서적대, 장안문, 북동적대, 북동포루

by 오향란 201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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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끓는 사부곡으로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도시 '수원화성'

정조는 어린나이에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와 안타까운 사별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한이 남달랐을 것이다.

 

 

▼ 북포루(北砲樓)

수원 화성에는 5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모든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지어졌다.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한다.

 

 

 

▼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포루 또한 성벽 밖으로 돌출시킨 형태로 외부에서 보았을 때 3층 높이이며 누각 판문에 구멍을 뚫어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번엔 성벽 바깥쪽을 돌아보아야 겠다. 단층처럼 아담하게 보이는 이 사진으로는 설명을 해도 이해가 곤란할 것 같다.

 

 

 

▼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정겹게 느껴지는 국제화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내가 거기에 거리낌없이 갈 수 있고 그들이 여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올 수 있음이... 

 

 

 

 

 

 

 

▼ 북서적대(北西敵臺)

적대란, 창이나 포를 비치해 두고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곳으로 성곽 안길보다 다소 높게 성곽 안팍에 걸쳐진 형태이다.

북서적대는 장안문 가까운 서쪽에 있다.

 

 

▼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수원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장안문(북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진 것이다.

 

 

 

 

 

 

▼ 북동적대(北東敵臺)

장안문 가까운 동쪽에 위치하며 북서적대와 같은 형태로 창, 포 등을 비치해 두는 곳으로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곳이다.

 

 

 

모자박물관이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 성곽안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북동포루(北東鋪樓)

북동포루는 북서포루의 설명과 크게 다를바 없으므로 화성의 북동쪽에 있다는 것으로 대신한다.  

 

'향기'가 힘들을 것 같아 여기서 이 자세로 한참을 쉬게 했다.

우리야 성벽 안팍을 구경하며 재미있게 걷지만 아빠 엄마 따라 무조건 걷기만 한 우리 향기는 많이 지루하고 피곤했을 것이다...  

 

 

 

 

 (2011.05.05)

 

당쟁의 희생물이 된 '장조(사도세자, 1735~1762)'

조선 후기 영조와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아주 총명하였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 '신임사화'에 대하여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함으로써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사도세자가 15세가 되던해 1749년(영조 25년) 영조의 명을 받고 서정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정순왕후 김씨와 결탁 세자를 끌어내리고자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하는 등의 모략으로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샀으며 아버지를 무서워한 세자는 궁궐 내에서 칼을 휘두르고 궁궐을 빠져나가는 등의 비정상적인 행보를 하였다.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세력을 떨치자 그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영조에 올리도록 하였다(나경언의 상변). 이 일로 인해 세자의 비행을 올린 나경언은 참형을 당하고 영조는 세자를 조목조목 다그치고 자결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었다(1762년.28세).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죽은 세자에게 사도의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영조의 뒤를 즉위(1776)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이라 개칭하였으며, 1789년(정조13)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영우원(永佑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혜경궁 홍씨가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종()으로 격상시켜 능호를 융릉()이라 정하였으며 12월 19일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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