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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 지도자들의 면면과 배경, 폴 포트 정권이 붕괴 후 그들은...

by 오향란 2008.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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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포트 사진  

 

 

 

 폴 포트 정권 지도자들의 면면과 배경

캄보디아를 야만의 시대로 이끈 크메르 루즈 지도부를 구성한 인물들의 면면과 배경을 보면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다.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중에 이엥 사리, 키우 삼판, 키우 티릿, 손 센 등을 만나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중 키우 삼판은 파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자였다. 이들은 귀국한 이후에는 대부분 중,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국내파인 누온 치아와 윤 얏 역시 학교 선생이었다. 거의 모두가 대학을 나오고, 다수가 프랑스를 유학하였으며,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당시 캄보디아 실정에서는 최고 엘리트이자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속했다. 그들의 출신 배경 또한 화려하여 폴 포트의 사촌누이는 모니봉(Monivong)의 왕비들 중의 하나였고, 그와 그의 동서 이엥 사리의 장인은 판사로서 그의 두 딸 모두를 프랑스로 유학을 시켰다.

 

  

 폴 포트 정권이 붕괴 후 그들은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된 지 30년 가까이 지나고, 유엔 개입에 의해 평화가 찾아 온 지 15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가공할 범죄 집단에 속한 자 중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유엔 인권 법정이 겨우 작년에 활동을 시작해, 이미 그 전에 누온 치아, 이엥 사리, 키우 삼판, 께 뽁, 키우 티릿은 모두 훈 센(Hun Sen) 정부 투항하여 자유시민으로서 평화로운 생활을 즐겼고, 투항을 거부한 채 산속에 머물던 폴 포트는 1997년 6월 자신을 배신한, 손 센과 윤 얏 부부를 부하를 시켜 처단한 뒤, 7월 이후에는 그의 부하였던 따목에 의해 감금 생활을 하던 중, 1998년 4월 15일 잠자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투옹슬랭 감옥 책임자였던 인간 백정 도익은 수년 동안 끈질기게 추적한 아일란드의 한 사진작가에 의해 1999년 은신처가 탄로난다. 그는 당시 이미 기독교도로 거듭 난 뒤 미국 인권단체에서 일하다가 다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무고한 국민들을 무차별하게 죽이고서도 모두가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는데 아무런 제제가 없었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상식적인 폴 포트 정부

크메르 루즈군 공산당 특별중앙위원회는 프놈펜을 점령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75년 5월 20일 이른바 긴급현안 8개항을 발표하였다. 도시인구 소개, 시장 폐지, 통화 철폐, 승려직 폐지, 론 놀 정부 고위관료 처형, 공동취사 및 협동농장 설치, 베트남인 추방, 모든 병력 국경배치 등 기존 사회 제도와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크메르 루즈들은 프놈펜인들을 속였다. 예상되는 적군의 반격으로부터 프놈펜 시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피난에 불과하다고... 이를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타고 길게는 한 달까지 걸려 크메르루즈가 정해 주는 농촌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2백만명에 달하는 프놈펜 인구를 단 사흘 만에 모두 도시 밖으로 몰아 내었다. 시골로 쫓겨간 도시민들은 하루 두 끼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강제수용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공동취사를 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서로 분리되어 다른 지역이나 작업장에 배치되었다. 어떤 불평불만도 허용되지 않았고 작업장을 이탈하거나 음식을 훔쳐 먹는 것과 같은 조그만 잘못도 극형으로 처벌되기가 일수였다. 복종과 침묵만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요령이었다.

 

크메르 루즈군의 이념은 상식밖이다. 원시사회에 가까운 농촌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이들의 세계관과 국가관은 체계적인 이념이나 현실적인 발전 전략으로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초보적인 것이다. 더욱이 짧은 시간에 무차별적 학살은 크메르 루즈 정권이 상식에 닿지 않을 정도의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도모했기 때문이다. 뚜올슬렝의 옥사를 들여다 보자. 다른 나라들의 정치범 수용소나 강제 수용소와 다르다. 우선 이 곳을 통해 죽음에 이른 희생자들 대부분이 다름아닌 자신들의 동지인 크메르 루즈들이다. 더욱 가증스런 일은 뚜올슬렝 감옥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던 자들의 80%가 20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론 놀 정권과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 전문가나 지식인, 소수민족(베트남계, 중국계, 참족), 성직자(불교, 이슬람, 기독교), 동성애자 등이 명시되었고, 안경을 착용하였거나, 손이 고운 사람까지 전문직 종사자나 지식인이라며 잡아다 강제로 자백을 받아낸 뒤 처형하였다. 이를 비판하거나 과격 노선에 반대하는 같은 당원들 조차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적이나 스파이로 몰아 숙청하였다. 심지어 어른들은 정신이 오염되어 혁명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며 구타를 하고 살인을 일삼은 인간 말살의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폴 포트 정권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캄보디아 근대사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위해 월남이 프랑스로 부터 독립됨에 따라 캄보디아는 어부지리로 독립군이 된다. 당시 노로돔의 아들인 시아누크왕은 민주 사회당을 구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며 1965년에는 미국과는 단교를 하고, 미국의 지지 세력인 남베트남과 태국을 안보세력으로 간주한다. 대신 북베트남과 베트공 군사들이 캄보디아에 주둔하도록 허락하여 1969년부터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한다.

 

 시아누크가 1970년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미국의 지지를 받은 롤 론이 정권을 잡는다. 이로인해 시아누크는 중국에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중국의 압력에 따라 폴 포드 정권이 이끄는 크메르루즈와 연합하여 롤 론 정권에 대항한다. 크메르루즈는 농촌지역에서 지지를 얻었으며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2주전 프놈펜을 함락한다. 1976년 폴 포트는 크메르 왕국의 영토였던 베트남의 남부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하지만, 79년 페배하여 정글로 쫏겨나고 만다.

 

 베트남은 한때 크메르루즈의 장교였던 훈 센과 휑삼린을 내세워 꼭두각시 정권(1979~1993)을 세운다. 이후 소련연방의 해체 여파와 국제 세계무대에서 고립을 우려한 베트남이 물러간 것은 1989년이다. 카메르루즈가 불참한 선언한 가운데 1993년 UN 총선 결과 시아누크 아들인 라나리드가 제1총리, 훈 센이 제2총리로 선출 된다. 그러나 군사력이 우세한 훈 센이 97년 라나리드와 힘겨루기에서 이겨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한다. 훈 센은 베트남 군정시절 1985년 총리직에 오른 이후, 1993년 민선 정부 들어서도 세번의 총선을 거쳐 현재까지 23년간 총리직을 고수하고 있다.

 

 기록일 2008.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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