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루마니아

루마니아 혁명의 광장에서 본 차우셰스쿠 궁전과 구 공산당 본부 그리고 나디아 코마네치에 대해서

by 오향란 2011. 10. 31.
반응형

 

▼ 시나이아에서 관광을 마치고 부카레스트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나이아 관광을 마치고 부카레스트로 되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다른 반대편 방향으로 산맥을 돌아 2시간 정도 걸렸으며 또 다른 풍경이 감상을 준다.

차창으로 보이는 송전탑은 독재체재의 산물로 차우셰스쿠 시절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제 위치를 찾았지만.

 

 

 여기에 루마니아가 낳은 체조의 여왕 "나디아 코마네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체조에 있어 그 어떤 인간도 10점 만점이라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룰을 깨고 "나디아 코마네치"는 1976년 7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계 최초 10점 만점의 대기록을 세우며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10점 만점의 행진이 6번이나 더 이어져 7번의 10점 만점을 받는다. 이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벨라 카롤리" 코치를 떠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돌아와 차우셰스쿠 치하에서 이용을 당하며 자신을 가두고 살아 그녀를 아끼는 세계인들의 아쉬움을 사기에 이른다. 2년 뒤 미국인 벨라 카롤리 코치가 그런 그녀를 설득한 끝에 다시 연습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나디아 코마네치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따며 개인 종합 2위로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1984년 은퇴를 선언하고 '벨라 카롤리' 코치의 도움으로 차우셰스쿠 치하의 참담한 생활을 접고 1989년 미국으로 망명을 한다 하지만 나디아 코마네치의 삶은 마약을 하는 등 미국에서도 좋지 않았다 코마네치와 같은 시기의 미국 체조 선수 '버튼 코너'의 끈질긴 설득과 구혼 끝에 1996년 결혼을 하였고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루마니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그리고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아이를 뒤늦게 얻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인들은 나디아 코마네치를 국모로 여길 정도여서 미국 국적을 버리고 루마니아를 위해 일해달라는 정치적 제의를 수없이 하고 있다고 한다.

 

 

 

인민 궁전 (차우셰스쿠 궁전)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치스런 생활과 무자비한 독재로 막대한 재정을 탕진하면서 지은 초호화판 궁전으로 단일 건물로는 세계에서 두번째 규모라고 한다.

현재는 궁전의 일부를 국회의사당으로 쓰고 있는데 이 궁전에는 3000개가 넘는 방이 있으며 지하의 벙커시설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어 아직까지 파악이 안된 곳이 있다고 한다.  

 

◆ 인간사가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라지만 차우셰스쿠 부부는 억울하기도 했을 것 같다. 갖은 책망을 들으면서 지은 궁전인데 살아보지도 못하고 연설 한번 못해 보았다고 하니 말이다.

 

 

상원의회 건물(구 공산당 본부)

현재 상원의회 건물로 쓰이고 있는 구 공산당 본부 건물인 이곳 옥상에서 1989년 12월 23일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혁명군에 쫏겨 백색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고 한다.

 

 

 

▼ 혁명의 광장 근처의 건물들로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관련된 건물들인데 이름은 기억을 하지 못하겠다.

 

 

 

차우셰스쿠는 북한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추앙하며 혈연 중심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중앙집권화 정책을 고수했고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대대적으로 벌이며 극비리에 키운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국민과 언론매체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비교적 부유한 편에 속했던 루마니아는 엄청난 부채로 아사 일보직전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차우셰스쿠는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차우셰스쿠를 비롯한 후세인, 카다피, 등 독재자들의 말로가 이러한데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며 3대를 이으려는 북한의 독재가 위대한 건지 대단한 건지 참으로 아리송하기만 하다.

 

 

 루마니아(RUMANIA)

 

로마제국의 후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국명을 가진 루마니아는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동쪽으로는 몰도바, 서쪽으로는 헝가리, 남서쪽은 도나우강을 경계로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며 남동쪽으로는 흑해에 면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41개 주와 1개 지방자치시(부카레스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인구는 남한 인구의 절반 정도이며 이 중 80%가 루마니아 정교도이다. 그리고 루마니아에서는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YEs이고,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면 No라고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차우셰스쿠(Nicolae Ceauescu)는 스코르니체슈티 출신(1918.1.26)으로 1933년 불법정당인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중앙의원이 되었으며 1936~1939년, 1940~1944년 2회에 걸쳐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공산권하가 되자 당 중앙위원, 국방차관, 정치국원 후보를 거쳐 정치국원이 되었다. 1965년 3월 의장이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자 심복이던 차우셰스쿠는 그의 뒤를 이어 공산당 제1서기장으로 지도자직을 계승(1965.7)하고 1967년 12월에 국가 평의회 의장을 맡으며 1968년 11월 사회주의 통일전선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74년 3월에 공화국 대통령직이 신설되자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겸임하며 절대권력을 행사해 1985년 4선 대통령이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1989년 12월 17일 '티미쇼아라'에서 연설을 하던 중 독재를 참다 못한 민중이 반기를 들자 총살을 하였다. 이로인해 반정부 시위가 불같이 확산되었으며 차우셰스쿠는 군대를 투입시켜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강행했으나 반정부 시위는 수도 부카레스트까지 번졌으며 이에 12월 22일 루마니아 군대는 반정부 시위자들에게 굴복을 했고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리곱터를 타고 부카레스트를 떠나 도망가던 중 기장이 헬리곱터를 불시착 시키고 달아나는 바람에 무장군인들에게 체포되어 1989년 12월 25일 대량학살을 비롯한 여러가지 죄목으로 특별 군사 법정에서 긴급재판을 받고 유죄가 인정되어 그날로 공개 총살형을 당하고 혈연들은 구속이 되었다.

 

 

여행일 2011.10.1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