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경기&인천

추석 당일 안성남사당놀이공연 평양통일예술단과 함께 하다

by 오향란 2014. 9. 12.
반응형

 

 

안성 남사당공연장

 

 

 

 

 

좌석제인 줄 모르고 예약없이 가서는 그마저도 느긋이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남은 표를 구입했다.

보나마마 그럭저럭한 자리이겠지 했는데, 아마도 좋은 자리로 치자면 열 번 안에 드는 정말 좋은 앞자리를 차지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내가 나들이를 하면 빗나가고, 주차 공간이 복잡해도 내 차 쉴 곳은 생기고, 빽빽한 장소에도 내 자리는 흡족하고...

소소한 행운은 늘 나를 따르는 것 같다.

 

 

남사당 공연장에 들어서서 줄타기 기구 체험을 하고 있다. 장구 치는 모양으로 사진도 찍고... 

 

 

 

↓ 남사당 상설 공연장이 있는 2층의 한쪽 모습이다.  

 

 

 

남사당 상설 공연장의 천장이다.

 

 

 

평양통일예술단 공연

추석맞이 안성남사당놀이 틀별공연의 시작은 평양통일예술단의 연장자로 보이는 1인이 인사를 하는 것으로 첫머리를 장식했다.

 

 

 

노래는 어떠한 노래든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추석이라서 느낌을 더 받았을 것 같기는 하나 평양통일예술단원의 노래 소리는 심금을 울린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북쪽 고향을 그리는 듯한 멘트와 '추가열의 행복해요'란 노래는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숨쉴 수 있어서 바라볼 수 있어서 만질 수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말할 수도 있어서 들을 수도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이중에서 하나라도 내게 있다면 살아있다는 사실이죠 정말 행복해요 말할 수도 있어서 들을 수도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숨쉴 수 있어서 바라볼 수 있어서 만질 수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말할 수도 있어서 들을 수도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죽은이의 그토록 바라던 소원은 숨쉬는 오늘이 바라던 내일이죠 살아 있어 행복해 살아 있어 행복해 니가 있어 행복해 정말 행복해요

살아 있어 행복해 살아 있어 행복해 니가 있어 행복해 정말 행복해요 살아 있어 행복해 살아 있어 행복해 정말 행복해요 정말 행복해요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공연

천장의 조명이 푸르스름하게 낮춰진 가운데 구슬픈 상엿소리와 함께 남사당공연이 시작되었다.

 

 

↓ 남사당 최초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의 탄생과 죽음을 해학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 관람객들과 호홉하는 시간, 이 여성은 한성탕면 한 봉과 안성포도 안 박스를 챙겼다.

 

 

 

 

 

 

바우덕이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으로 1848년 안성 청룡사 인근 사하촌 불당골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다섯살 되던 해에 관행처럼 이어져온 남성 일색의 남사당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입단하여 자라면서 기예를 익힌다. 그녀는 줄타기, 살판, 노래, 풍물놀이 등 남사당 놀이의 모든 기예에 아주 월등한 재주를 보여 관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는다. 이후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윤치덕)가 연로하여 사망에 이르자 당시 15세이던 바우덕이가 여자의 어린나이로 꼭두쇠에 추대된다. 바위덕이는 그로부터 13년 간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병을 얻어 23세 청춘 나이로 거리에서 사망한다.

 

 

 

 

 

 

안성남사당패가 펼쳐온 놀이는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가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12년(1865) 경복궁 중건 때 대원군이 노역자들을 위로코자 안성남사당패를 불러서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다녔다고 하며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당시 최고의 영예인 정3품(지금의 도지사급) 벼슬 상당의 옥관자를 수여했다.

 

 

 

 

 

 

 

안성남사당 놀이패는 꼭두쇠(우두머리 혹은 모갑이)의 능력에 따라 50명 안팎의 단원을 이끌었는데 통솔력은 엄격했다고 한다.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최연소 공연자의 기특함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통은 응석을 부리고 떼를 쓰고 할 나이인데 어려운 기예를 척척 해내며 공연을 소화해 내는 것이 안성남사당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안성남사당은 꼭두쇠 바우덕이가 죽고,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해체와 결성이 반복되는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근거지이었던 안성을 중심으로 서울을 오가며 남사당의 전통을 끈질기게 이어온 결과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남사당을 보존 발전시키게 되었다.

 

 

 

 

 

 

 

 

 

 

 

안성시에서는 1990년 안성 청룡리 개울가에 방치되어 있던 바우덕이 묘를 조사 발굴하여 새로이 단장을 하고

2001년도부터는 세계적인 문화로 전승 발전시키고자 해마다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를 개최하는 한편, 2002년 시립 남사당바우덕이 풍물단을 창단했다.

 

 

 

 

↓ 공연을 마치고 풍물단과 관객들이 놀이 마당에서 신명나는 한 판을 벌이고 있다. 

 

201.09.08.(추석날)

 

 서민사회에서 발생한 사당패에 관한 기록은 조선 명종 때 부터 전해지는데 그들은 당시 천박한 유랑집단이었고 양반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한결같이 패륜패속(悖倫敗俗)의 무리라는 도식적 평가절하로 몰아 붙혀졌다. 남사당패의 은거지로는 경기도 안성과 진위, 충청남도 당진과 회덕, 전라남도 강진과 구례, 경상남도 진양과 남해, 황해도 송화와 은율 등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안성 청룡사 마을의 남사당패였다. 이들의 겨울은 은거지에서 근근히 연명하며 어린 단원들에게 기예를 가르쳤으며 봄철 농번기가 오면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마을 출입마저 수월치가 않았다. 서민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에게는 멸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으로 마을의 권력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과정이란 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남사당 기를 흔들고 풍물을 치며 온갖 재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니면 특별한 임무를 띤 곰뱅이쇠가 혼자 마을로 들어가 권력자에게 간청하는 방법을 썼으나 성사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곰뱅이란 사당패의 은어로 '허가'의 뜻이고 이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곰뱅이쇠'이다. 마을에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가 오면 의기양양하게 길 놀이를 펼치며 들어간다. 이렇게 마을에 들어가 한바탕 신명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일정한 보수는 없었으며 먹고 잘 곳만 제공되면 언제 어디서든 날을 밝히며 놀이판을 벌였다. 그 때에 행해지던 종목 가운데 얼른(요술) 종목은 사라져 전해져 오지 않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