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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조선통신사비, 쓰시마시청사,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가네이시성(금석성), 고려문

by 오향란 2015.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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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시청사

 

 

↓ 차량도 인적도 보기 드문 쓰시마시청사 앞길

 

 

덕혜옹주 결혼봉축비는 쓰시마시청사에서 길 하나를 두고 있는 가네이시성(금석성)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가네이시 성(金石城)

가네이시성은 임진왜란 때 축성된 시미즈 산성의 기슭에 위치한 쓰시마 번주 소 가문의 거성으로써

근세 성곽으로 개축이 되어졌으며, 성터는 사적으로 정원은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 가네이시성의 고려문(高麗門) 통칭: 오데문, 고라이문

우리의 기와집 형태인 고려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영빈문으로 1990년 이축 복원했되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

1931년 쓰시마 번주의 후예인 다케유키공(公)과 조선의 왕녀 덕혜옹주의 결혼을 경축하기 위해 신사에 세웠던 결혼봉축비는 

1955년 이혼으로 파기되었으며, 현 결혼봉축비는 2001년 11월 한국 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가네이시 성에 이축 복원된 것이다.

 

 

가네이시 성내에 매표소가 있으며, 티켓(300엔)을 구입하면 역대 쓰시마 번주를 모신 반쇼인과 덕혜옹주가 산책했다는 정원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 관리인에 따르며 한국의 관광객들은 덕혜옹주 결혼봉축비만 보고 돌아간다고 한다. 나도 역시 가이드 인솔에 따라 매표소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낙점된 사진

가네이시성과 옆으로 나란히 하고 있는 이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가사키현립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으며, 오르는 길목에는 옛 고려문 터와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나가사키현립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1층만 관람을 허용하고 있으며, 대마도 실측도와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그림 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자료들이 있으나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다.

 

 

▽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주차장에 평평하게 해놓은 이곳은 옛 고려문(통칭: 오데문, 고라이문)이 있었던 자리다.

 

 

조선통신사비

쓰시마는 조선 통신사를 맞는 일본측의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시 쓰시마 사절단은 부산까지 출영하여 한성에서 오는 통신사 일행을 기다렸으며

쓰시마에서 에도(현 도쿄)까지 왕복 동행하며 안내 및 경호를 했다.

 

는 그 옛날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우월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지금도 매년 8월의 첫 번째 토요일과요일에 "쓰시마 아리랑축제"가 이즈하라에서 개최되며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 대마도(쓰시마) 관광의 시작과 끝을 맺었던 티아라 사거리를 담았다.

이즈하라의 티아라는 쓰시마의 명동으로 불리는 곳으로 티아라 사거리를 중심으로 행정기관과 상권이 모여 있다.

 

 

 

 

여행일 2015.06.03.

 

비운 덕혜옹주 이야기

 덕혜옹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민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이 양귀인과의 사이에서 환갑얻은 고명딸로 1912년에 태어났으며, 소학교 5학년이던 1925년 일본으로 강제 끌려가 신경쇠약증세라는 병을 얻었다. 스무살 되던 1931년 5월 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공(公)과 정략 결혼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딸 정혜(마사에)를 낳았다. 부부간의 금술이 좋았으병세가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호전이 되지 않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약 15년 동안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이혼했으며,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다. 1956년에 외동딸인 정혜가 결혼했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962년 정치적 유여곡절 속에 귀국길에 올랐지만 20년이 지난 1982년에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지병과 실어증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소재한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다케유키공(公)이 아내 덕혜옹주에게...

고귀한 그대가 일개 쓰시마 번주의 아들에게 시집온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오, 하지만 어찌하겠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나 역시 황실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오, 그대에겐 부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피해자요...

 

한 나라의 왕녀로서 겪었던 고뇌와 참담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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