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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부산&대구

故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역사가 숨쉬는 독일마을

by 오향란 201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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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독일마을

1960년대 어려운 시기에 조국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헌신한 독일 거주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고 독일의 이국 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자연 경관이 우수한 삼동면 일대 100,000㎡ 부지에 사업비 30여 억원을 들어 2001년부터 택지를 조성해 독일 교포들에게 분양한 마을이다. 주택은 독일식으로 설계가 되어 교포들이 거주하며 관광객을 위한 민박도 운영하고 있다.

 

 

 

 

 

 

 

독일마을 탄생의 배경

 

1961년 군사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1목표는 경제발전이었다.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산업개발이 우선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로 했지만 한반도의 가난한 작은 나라에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젊은이들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마침내 1962년 10월 독일로부터 1억 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들여왔다. 남자는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란 이름으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00여명의 광부와 10,200여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파송되었고 차관은 늘어났다. 당시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은 우리나라의 6~7배 수준이였으며 임금의 80%를 한국으로 송금했는데 그 금액은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3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독일행은 그야말로 인생역전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수십대의 경쟁률을 뚫은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소수였고 공과대학 등 고졸 학력 소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부푼 기대 속에 부러움을 받으며 독일로 떠났다. 하지만 이들의 독일 생활은 눈물의 얼룩이었다. 광부들은 40도가 넘는 지하 갱도에서 옷을 짜서 입으며 장화 속에 고인 물을 열 번은 쏟아내야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났다. 작은 몸집에 언어도 안 통하는 간호사들의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참아야만 하는 여건 속에 약정 3년이란 시간이 언어와 간호사로서의 인정을 이끌어 냈고 그런 간호사를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은 양국간의 손실이라는 독일의 제안에 따라 간호사들은 연장을 할 수 있었으며 1977년까지 광부와 간호사의 파송은 계속 되었다.

 

 

 두어 곳에서 자료 발췌

 

서독 대통령도 함께 눈물 흘린 "대한민국 울음바다"의 현장 (박정희 대통령과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의 눈물)

 

1964년 12월 10일 서독 탄광지역 공회당에서...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에서 눈물로 중단되어 '대한민국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40대의 팔팔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울고 광부와 간호사가 울고 안내하던 뤼부케 서독 대통령 마저 눈물을 글썽였는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오늘의 풍요와 태평을 누리는 세대라면 모를까 그때 그 세월을 체험했던 세대는 지금도 말만 들어도 다시한번 감격하고 울먹이는 대목이다.

 

 

"후손들을 위해 번영의 터전을"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정부가 보내 준 루프트한자 649호 비행기에 탑승 독일 퀼른본 공항에 내렸다.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가 따뜻이 맞아 주었다. 이즈음 서독에 파견되어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독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었다.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지방 탄광지 공회당에 도착하자 막장에서 일하던 작업복 차림의 대한민국의 광부 500여명이 환영했다.

 

대한민국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목맨 소리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라고 연설하자 여기저기서 울먹이는 소리가 나왔다. 대통령이 연설도 중단하고 울먹였다. 광부와 간호사와 수행원들도 울었다. 대통령이 공회당 밖으로 나오는데만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떠나시렵니까"...

 

당시 유일한 여기자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했던 정광모씨는 그날 밤 투숙 호텔 아래층에서 박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위층으로 올라갔더니 대통령이 훌쩍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전한다. 대통령이 정기자에게 술잔을 권하며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 전에는 다시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울먹이더라고 증언했다. 1964년의 대한민국은 그랬던 나라이다.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릴 때도 차내가 울음바다였다. 뤼브케 서독대통력이 손수건을 꺼내 가난한 나라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었다.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분단 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건설 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 이후 독일정부의 각별한 성의로 마르크 차관을 도입하고 야당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며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경제 개발의 일등공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조국 근대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이은 1966년 한,미간 방위조약을 위한 월남파병의 역사도 '잊혀진 영웅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월남파병은 당시 야당의 극렬한 반대 뿐만 아니라 '미국의 용병'이라는 비판마저 제기되었다. 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분쇄할 수 있는 한미간 방위조약을 위해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청화대 관저 침실에서는 아침마다 담배꽁초가 30~40개씩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밤새 잠 못 이루고 고뇌하느라 쓴 담배를 수없이 피웠다는 이야기다. 끝내 월남 파병으로 한미간 방위조약은 더욱 굳건해지고 한국 기업들이 월남 진출로 전쟁특수를 누려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참정기간 5년간 한국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1억 5천만 달러라고 집계하고 있다. 광복 후 1인당 국민소득이 300달러 세계 최빈국 시절에 1억 5천만 달러가 얼마나 막대한 금액인지는 계산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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