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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스탈린 박물관에 가다 - 조지아 고리(Gori)

by 오향란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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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스탈린은 본인의 생가에 자신의 박물관을 세웠다.

스탈린은 조지아 고리(Gori) 태생으로, 1883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스탈린 전용기차

스탈린 박물관 건물 옆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기차, 특수 방탄유리와 특수 합금으로 제작돼 1941년부터 스탈린의 전용기차로 사용되었으며, 알타 회담과 테헤란 회담 때도 이 기차를 이용되었다. 

 

 

 

스탈린 흔적, 전시관 천장을 빙 두르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러시아 제국 치하의 조지아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장과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지냈다.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을 전복시키고, 소비에트 연방 건국에 일조한 볼셰비키였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해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대숙청을 벌여 정적과 반대자들을 제거한 당대의 폭정 독재자이다. 

 

 

스탈린 전시관에는 스탈린의 일대기를 빼곡히 전시하고 있가 빼곡하다. 

스탈린의 두 아내

 

● 스탈린의 첫 번째 아내 에가케리나 스바니제((1880~1907)

스탈린은 조지아인으로 생활하던 시절인 1925년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와 혼인했다. 둘 사이에 첫 아들인 야코프 주가쉬빌리가 태어났다; 이 시절 스탈린은 볼쉐비키의 비밀당원으로서 혁명활동에 몰두하고 있었고, 스바니제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로 피신했다. 그녀는 몸이 허약했고, 잦은 도피 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결혼한 지 16개월 만인 1907년 12월 5일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스탈린은 아내를 묻는 자리에서 긴 통곡을 하였고, 친구에게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간적인 감정 또한 이곳에 묻었다"라고 했다. 이후 스탈린은 더이상 조지아의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 이름)가 아니었으며, 레닌이 붙혀준 스탈린(강철의 인간)이라는 악명 높은 이름으로 46년의 세월을 살았다. 

 

스탈린은 첫 번째 아내(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아들(야코프 주가쉬빌리)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야코프 주가쉬빌리는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며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했다. 이로 인해 야코프 주가쉬빌리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 나데즈다 알릴루예바(1901~1932)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비서로 근무했고, 1919년 스탈린과 결혼하였다. 1921년에는 아들(바실리 스탈린), 1926년에는 딸(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낳았다. 1932년 11월 9일에 열린 소련 공산당의 혁명 기념 만찬에서는 소작농의 집단화 정책을 놓고 스탈린과 말다툼을 벌이다 비난당하는 수모를 받았다. 공포정치에 여성 편력까지 스탈린은 더이상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었고, 그토록 존경하던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탈린을 맹비난하는 글을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스탈린은 알릴루예바가 남긴 편지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스탈린은 장례식장에서 관속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마치 적대자처럼 날 떠나는군"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때도 첫 번째 부인이 사망했을 때처럼 권좌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 그의 폭정은 더욱 심해졌다. 

 

 

스탈린은 이 사건 때문에 딸(스베틀리나 알릴루예바)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무조건적으로 뒤를 봐주던 장교 아들(바실리 스탈린)은 스탈린이 죽자 후계자 자리에서 강제로 쫒겨나고 만다. 

 

 

두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과 딸_스탈린은 이 두 자식을 무척 아꼈었다고 한다

 

●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러시아 제국 조지아 동부 고리에서 제화공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슬하에서 삼남으로 태어았다. 위로 두 형은 모두 태어난 지 몇 달 안돼서 죽었다. 스탈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문맹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머리가 꽤 좋아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튀르기예어까지 구사했다. 사업도 잘 되어 부유하게 살았는데, 그의 결혼을 시기하는 여자들이 그의 아내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돈 대신 술을 내는 조지아 특유의 관습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걸핏하면 싸우고 가정 폭력을 행사했다. 어린 스탈린을 때리고 어머니를 트집잡으며 사생아라 욕했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더 악화되어 세간살이까지 팔아 술을 사먹는 지경으로 전락했다. 이즈음 스탈린은 마차에 치어 왼팔을 다쳐 장애를 남겼다. 스탈린은 아버지를 증오했고, 훗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무덤을 갈아엎어 버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스탈린을 정교회 주교로 만들고 싶어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소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버지는 이를 무시하고 스탈린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쳤다. 이때(7살) 스탈린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얼굴에 곰보를 남겼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했다. 스탈린은 병이 낫자 마자 집을 나가 버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에게 끌려간 스탈린은 구두 기술을 배워야 했다. 다행히 1889년(10살)에 신학교와 여러 사람들이 도움으로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고, 1894년(15살)에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 트빌리시에 소재한 조지아 정교회 신학교에 진학했다. 스탈린의 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당시 스탈린은 카리스마를 보여 상급생을 부하로 거느리기도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그 수많이 찍은 사진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속상한 마음이 이만저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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