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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신풍루,거중기,좌익문,봉수당,장락당,노래당,유어택,복내당

by 오향란 200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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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화산능(華山陵) 참배시 거처하던 곳으로 총 600여칸 규모의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한양을 떠나 다른 지방에 행차할 때 임시로 묵는 거처를 말한다. 

 

 

 ▼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며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이 담긴 정조(正祖)가 지은 이름이다. 정조대왕이 수원을 크게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앞에서 민족전통무예인 무예 24기 시범 공연을 하고 있다. 

 

 

 

 

 ▼ 거중기(擧重機) : 도르래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이용한 도구

정조가 정약용에게 왕실에 있던 서양과 중국의 기술서적을 주어 연구하게 하여 과학기술과 건축술이 총동원하여 거중기 등 신기제를 만들었다.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거중기 등 신기제를 이용해 화성(華城)을 2년 반의 짧은 기간에 완공 할 수 있었으며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공사비용을 30%정도나 절약하였다 한다.  

 

 ▼ 좌익문(左翊門)

 

 

 

 

 

 ▼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19)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 봉수당(奉壽堂) 내 정조(正祖)가 거처하던 곳

 

 

 

 ▼ 정조가 1795년 을묘년 원행시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진찬연을 열었으며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진찬연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였으며 당시의 커라단 화제거리로 왕실과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아들 정조(正祖) 부부로부터 문안을 받는 모습

 

 

 

 ▼ 장락당(長樂堂)

1794년(정조18) 화성 성역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1795년 혜경궁의 침전으로 사용한 건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 노래당(老來堂) :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 노후생활을 굼꾸며 지은 건물

노래(老來)란 말은 "늙은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 곳이 고향이다"라는 백거이(당나라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정조가 왕위를 순조에게 양위하고 내려와 머물르려 했던 건물이다.  

 

 

 ▼ 유여택(維與宅)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正祖)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에서 왕과 왕비복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어 보았다. (옆전 40냥, 2인:4000원)

 

 

 ▼ 복내당(福內堂)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장락당(長樂堂) 남쪽에 위치해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복내당(福內堂)에는 드라마 대장금의 흔적이 가득하다.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선 드라마 영화 촬영을 많이 했다. 대장금, 왕과 나 등..

 

 

  

 

 

 

 조선시대 왕가 최대의 비극중의 하나로 꼽히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음, 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英祖)... 어린시절 정조는 아버지가 비명에 죽어가던 모습을.. 그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조선 제 22대 왕 정조대왕이 된다. 왕이된 이후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장용위라는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군조직을 편성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장용위는 후에 중앙군영인 장용영으로 발전하게 된다. 화성(華城)은 정조가 이런 시대상황에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와 왕권의 강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계획한 동양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며 건설했던 당대의 신도시 화성(華城)... 정조(正祖)를 떼어 놓고는 수원 화성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정조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묘자리를 찾아 드리는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달프게 죽은 아버지에게 효(孝)를 행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했을 정조는 망부의 한을 따라 자신의 한을 따라 한양에서 부터 지지대고개를 넘어 죽은 아버지를 보러 다녔을 것이다. 그러면서 화산능에서 가까운 수원에 화성을 건축할 꿈을 키웠을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각자의 가치관의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은 정조의 효심은 자랑할만하며 그 정조가 사랑한 효(孝)의 도시라 불리워지는 수원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답사일. 200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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