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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가다. 제암교회, 3.1운동순국기념비, 3.1운동순국기념탑, 제암리 순국23위지묘 (사적 제299호)

by 오향란 201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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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6월 6일 현충일에 작은딸과 외손녀가 와서 현충일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는 역사를 고취시킬 겸 화성시에 자리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찾아가 보았다.

 

 

  현민이 보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2001년 개관)

화성지역의 3.1운동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제1전시관과 경기도와 전국의 3.1운동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제2전시관 그리고 제암리 사건 자료를 영상화한 시청각실을 갖추고 있다.

 

 

▼ 경기도 화성지역의 3.1운동에 관한 역사와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제1전시관

 

 

 

 

 

너무나 가슴 아픈 만행의 현장,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 제암리 만행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63년 5개월 만에 이루어진 발굴 현장

1982년 당시 생존자였던 최응식 할아버지와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을 목격했던 전동례 할머니의 눈물

 

 

 

 

▼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전국 3.1운동에 관한 역사와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제2전시관

 

 

 

 

 

 

시청각실

제암리 사건을 목격한 증언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무슨무슨 기념관 같은 시청각실에서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아마도 이곳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상영시간 약 20분 내외)

 

 

  예쁜 현민아~ 시판음료는 우리 몸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거란다.

 

 

제암교회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으로

1970년 일본의 사회단체와 기독교인들이 속죄의 뜻으로 1천만엔을 보내와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되었으며 현재 3.1운동 순국기념관 위층에 자리하고 있다.

 

 

 

제암리 순국 23위지묘 오르는 길

 

 

제암리 순국 23위지묘 (사적 제299호)

1882년 발굴조사를 통해 일제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유해와 저고리단추, 못, 병 등 당시의 흔적을 발견하였으나 희생자들을 구분할 수 없어 함께 매장한 순국 선열들의 묘역이다.

 

 

1919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다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된 순국선열 23인의 넋을 기리고자 세워진 조형물.

 

 

불에 탄 예배당 터에 故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1959년 4월)가 새겨진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3월 10일 경 제암리의 안종린, 안정옥 등이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밤이면 마을 사람들과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제암리 주민 대부분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로서 3월 30일 발안 장날 안정옥, 안종환, 안진순, 홍원식 등이 만세운동 시위에 앞장을 섰다. 3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관공서와 주제소에 투석전을 벌였으며 홍원식과 안종후 등 6명이 붙잡혀 수원으로 이송되었으며 화수리와 사강리에서 일본 순사 2명이 피살되었다. 이에 일제의 피의 보복이 4월 4일부터 장안면과 우정읍 일대를 휩쓰는 가운데 4월 13일 일본군 중위 아리다가 사단을 이끌고 발안에 도착한다. 제암리에 살면서 일본 스파이 노릇을 하던 조희창이 발안 지역 독립운동의 근원은 제암리의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라고 밀고를 한다.

 

4월 15일 오후 3시 경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화해하자는 유인책을 써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에 못질을 하고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지르고 필사적으로 탈출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총격을 가하고 칼로 찔러 죽였다. 또한 천도교 전도사였던 안종환은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가 어린 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군은 눈꼽만큼의 인정사정도 없이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했으며, 교회 앞에서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두 아낙의 목을 베었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23명이었다. 일본군은 이에 끝이지 않고 민가에 닥치는대로 불을 질러 외딴집 2채를 제외한 31가구에 모두 불을 질렀다. 또 이웃 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칼로 마구 찔러 죽였다.

 

일본군의 서슬퍼런 감시로 누구도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아내 장사를 치를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4월 17일 이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이를 무릅쓰고 엉클어진 유골들을 들것에 실어 2km 떨어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하였다. 화성 제암리 사건은 3.1운동 이후 일어난 만세운동 가운데서 일제에 의해 가장 잔인하게 탄압받은 참상으로 캐나다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세계는 대한민국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대한민국 독립의 초석에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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