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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옛 향수를 불러오는 정지용 생가, 정지용문확관

by 오향란 201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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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생가를 알리는 시

 

 

시인 정지용은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음력)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를 다녔다. 14살 되던 해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며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성적은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어려워 교비생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3년 휘문고보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로 건너가 도시샤대학에 입학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향수'를 비롯한 문학작품 30여 편을 발표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사 되었다.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했다. 1945년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그 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2년 장남 구관이 48명의 문인과 각계 인사들과 협력하여 납북 후 묶여있었던 정지용 문학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고 1988년 해금되었다.

 

 

시인 정지용 생가

안채와 행랑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소박한 초가집으로 안채 옆으로 우물이 있고 이엉을 얹은 흙돌담장은 두 개의 사립문을 달고 있다.

 

 

 

 

 

↓ 안채 모습  

본래 정지용 생가는 1974년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서 있었으나

해금이 되던 1988년 6월 '시인 정지용의 생가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가 붙으면서 그의 자취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잇는 작은 공원에 정지용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정지용문학관

1996년 정지용 생가가 복원된 뒤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2005년 5월 15일 그의 생일에 맞춰 개관하였다.  

 

↓ 안내데스크 옆으로 정지용 밀랍인형이 벤치에 앉아 관람객을 맞는다.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남편과 함께였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문학관은 정지용 시인의 연보와 시집, 삶과 문화, 문학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학체험공간, 영상실, 문학교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정지용은 우리 말로 시를 짓는 일조차 죄가 되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경기도 부천에서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부천에 성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다니며 물질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다.

 

 

 

 

 

 

 

여행일 2015.08.30.

 

옥천은 남편의 고향이어서 일요일을 맞아 남편과 함께 하려고 했는데 쉬겠다는 말에 수긍을 했다.

아니 어쩌면 쉬겠다는 남편의 말이 은연중 고마웠는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혼자서의 여행이 편하니 말이다.

남편을 무척이나 생각하면서도 남편을 저버리고 혼자서 여행하는 것을 즐겨하는 나!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JTBC 비정상회담에 상정해 보고도 싶다. 정말 별스런 아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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