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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육영수 생가를 찾아 영부인 시절의 단한한 기품을 그려보았다

by 오향란 2015.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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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 여행

 

'육영수 생가'와 시인 '정지용 생가'는 공공주차장이 있는 사거리에서 일직선 근거리에 있다.

 

 

육영수 생가로 이어진

 

 

느티나무 (옥천보호수 제5호)

육영수 생가 근처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수령 370년으로 둘레 5.2m, 높이 16m이다.

춘기에 느티나무 잎이 풍성하면 풍년이 들고 부족하면 가뭄이 든다고 전해지며, 느티나무 아래서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대보름제를 올린다고 한다.

 

 

 

육영수 생가 (충북기념물 제123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옥천지역의 명문가로 교동집이라 불렸다

 

 1600년 대 삼정승(金정승, 宋정승, 閔정승)이 살았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 자손 민대감에게 1920년 매입하여 6,047㎡의 대지 위에 충청도 지역 상류주택의 양식으로 축조하였다. 육종관은 1965년 말 사망하였고 1969년 본래의 모습과 다른 현대식 한옥으로 개축하여 사용되어오다 재산 분쟁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퇴락하였고 1999년 철거되었다. 이후 상속권자가 옥천군에 기부채납했고 2002년 4월 26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안채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수차례 발굴과 자문회의 등 고증을 거쳐 2010년 5월에 안채, 사랑채, 위채, 아래채, 사당 등 건물 13동과 부대시설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육영수 생가 대문

 

 

연당사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사랑채 옆면으로 연못이 있으며 연못 뒤로 다리 받침을 한 연당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가족들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곳으로 겨울이 되면 연못은 스케이트장으로 변신을 하고 소녀 육영수는 스케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사랑채

故 박정희 대통령 방문 시 임시 집무실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문

건물들은 모두 기단을 높히고 각기 독립된 사랑채, 안채, 위채, 사당 영역으로 구획되고 담장, 협문, 부속건물을 적절히 배치했다.

 

 

안채 뒷

안방에는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가, 안방과 붙은 골방에는 육영수 여사가, 동쪽 날개 안사랑에는 아버지가 주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가난한 군인의 아내로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부업을 하면서도 만석꾼 부자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은 박정희와의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했다. 이혼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육영수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과 집을 나왔고 아버지 육종관은 자신의 허락없이 결혼한 육영수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박정희를 대면하지도 않았으며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사망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찾았을 때 눈물을 보이"제가 부덕하여 위대한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 안채 후면 툇마루에서 본 육영수 여사의 방

육영수 여사가 출가하기 전까지 사용하였던 방으로 책상 하나 놓고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앞면으로 어머니 방이 붙어 있고, 후면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 안에 화장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구조는 변기에 항아리를 두어 비워내는 형식이다.

 

 

안채 툇마루를 타고 육영수 여사와 관련된 사진과 글들이 놓여져 있다.

 

 

영부인이 되어서도 근검 절약을 아끼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 국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안의 제1 야당이라는 소리를 들은 육영수 여사는 다수 국민의 뜻에 귀를 기울였다.

 

 

 

육영수 여사의 검소하고 청빈한 일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 입은 적이 없고 양말을 꿰매 신었으며,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놓은 벽돌 두 개가 발견되어 직원들을 울리기도 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통합당 강세 지역인 호남에서 문제인 후보를 누르고 박근혜 후보가 소록도에서 62%를 얻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많이 생각 났었다.

록도를 방문한 육영수 여사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센병 환자들의 붕대감은 손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거 여기서 먹어도 되죠 하면서 소반에 담긴 사과를 덮석 베어 물었었던..

한센병 환자들은 이렇게 소중한 선물은 난생 처음 받아본다며 훌쩍이는 소리를 그치지 않았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의 손을 잡고 아름답고 귀한 손이라고 감격해 했었던...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쓴 휘호라고 한다. 날짜로 보아 미리 준비했던 것 같다.

 

 

어찌 그날의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

40년 전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지던 육영수 여사의 모습을

운구차가 육영수 여사를 싣고 청화대를 나설 때 눈물 흘리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하늘도 땅도 국민도 울었던 1974년의 광복절을

 

  

 

 

안채 뒤쪽 언덕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두었다.

 

 

석빙고

여름에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 땅 속을 광처럼 파고 그 위에 시멘트로 덮어 씌었던 냉장 시설이다.

입구는 반원 형태로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이다.

 

 

위채로 연결 된 문

위채에는 소실이 살았었다고 한다.

 

 

위채

 

 

 

 

사당 서쪽에서 과실수가 있는 정원으로 올라가는 문으로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있다.

 

 

 

과수원 안쪽에 배치된 정자

육영수 여사가 어린시절 과일을 따고 알밤을 줍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행일 2015.08.30

 

 대부분이 어렵던 그 시절, 외제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집 안에 4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 안에 소나 말을 부려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간도 있고, 큰 뒤주도 2개나 설치되어 있고, 집이 큰 만큼 우물도 여러 개가 있고, 연못도 있고, 과수공원도 있었던 육영수 여사의 생가

당시 주위는 모두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 소유였고, 그 일대는 육종관씨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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