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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 (겨울궁전) [러시아 성페테스부르크]

by 오향란 201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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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 (겨울궁전)

1852년 귀족들에게만 공개 되다가 1863년부터 일반에게 공개 되었으며 1922년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으로 명명되었다.  

 

 

▼ 겨울궁전 광장

볼셰비키 통치 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되어졌고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피의 일요일'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던 곳으로 수많은 정치적 사건과 함께 한 광장이다.

 

 

▼ 참모본부(1819~1829)

광장을 중앙에 두고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과 마주한 참모본부는 길이가 380m에 이르며 활처럼 휘어진 형태이다.  

 

▼ 알렉산드르 원주

알렉산드르 1세 때 나폴레옹과의 전쟁(1812)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원주이다. 성이삭 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몽페란드'에 의해 핀란드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47.5m, 직경 3.5m, 무게 661톤으로 원주 끝부분에 십자가를 든 천사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 박물관 내부

'에르미타쥐박물관'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루박물관처럼 약탈한 문화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집품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들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부여한다.  

 

 

▼ 군사 갤러리. 나폴레옹의 침입에 맞서 승리를 거둔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화

 

 

▼ 알렉산드르 1세 기마화 양편으로 332점의 국방계 인사들의 초상화가 있다.  

 

▼ 대관식을 치르던 방

1837년 재건하면서 이탈리아 북부 '카라라'산 힌대리석 기둥을 세웠으며 바닥은 16종의 나무로 아름다운 문양을 넣었다.  

 

 

 

▼ 목재로 만든 작품. 작품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 황금공작시계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시계는 에카테리나 2세가 수집한 것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작동시킨다고 한다.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봉쇄될 때는 시베리아 '예카데린부르크'로 작품들이 옮겨지기도 하고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의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질 때는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으로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기도 하고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박물관의 작품들이다. 

 

 

 

 

 

 

▼ 감옥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딸의 모습이다.

도덕적인 해석은 닫아두고 생명이란 차원으로 보고 있으니 이 기막힌 생각을 한 딸의 마음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이 작품은 곤충과 식물 모두 실제의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 '앙리마티스'의 춤 (1909~1910)  

 

 

 

 

 

 

 

 

▼ 네바강 쪽에서 본 겨울궁전(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  

 

 (여행일 2010.10.05.)

 

'에르미타쥐박물관'의 모태는 1711년 피터 대제(재위 1672~1725)가 레바강 언덕에 지은 궁전으로 1712년 자신의 재혼 피로연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다. 이후 피터 2세(1727~30),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1730~40), 이반 6세(1740~41)에 이어 처녀로 왕위에 오른 옐리자베타 여제(피터 대제의 딸)가 20년(1741~61) 동안 재임하면서 정치에 주력하기 보다는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서구의 작품을 사들이는데 열중한 나머지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겨울궁전을 짖는다. 뒤이어 불을 붙힌 것은 에카테리나 2세(1762~96)로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수집하여 겨울궁전을 포함한 5개의 건물을 연결해 지금의 박물관(1762~67) 모습을 갖춘다. 에카테리나 2세는 옐리자베타 여제의 언니의 아들 '피터 3세'와 결혼한 독일 여성으로서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지 6개월 된 남편(피터 3세)을 페위시키고 스스로 제왕에 오른 인물이다. 피터 3세는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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