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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부산&대구

대구 근대로에서 보는 항일정신, 이상화 시인과 서상돈 선생

by 오향란 2015.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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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인의 모습과

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져 있는 근대로를 찾았다.

 

 

 

이상화 시인은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항일문학가란 이유를 물어 경찰이 서재의 천장까지 뜯어 원고를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살았던 고택은

2001년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 근대문화 체험관 (계산예가)

주요시설로는 영상관(영상, 전시실) 그리고 한옥 전시관(마루, 방, 사랑방)이 있다.

 

 

 

↓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고택

 

 

항일문학가 시인 이상화 고택과 나란히 하고 있는 서상돈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곳으로, 당시 일제는 차관을 앞세워 경제 수탈에 열을 올렸다. 이에 서상돈은 1906년 김광제와 함께 애국계몽조직인 '대구 광문회'를 조직, 국채 1천300만원을 3개월간 담배를 끊어 갚고, 국권을 되찾자는 국채보상운동 건의서를 발의하게 된다. '국채를 갚아야 나라가 존한다고 하는 절절한 외침은 전국 각지로 울려퍼져 나갔다. 남자들은 담배를 줄이고, 부인들은 물론 기생들과 거지들까지 동참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훼방으로 1908년 중단되었지만 남녀노소 신분을 초월한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돼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애국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평생을 애국, 애족에 앞장섰던 서상돈은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패망한 지 3년 뒤인 1912년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2010)을 기념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삶을 짚어 책을 출간했다.

 

 

 내용에 따르면 서상돈 선생은 1850년 김천에서 부친 서철순(바오로)과 모친 김아가다 사이의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 살도 되기 전 부친을 여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가 있던 대구 부근으로 이사를 왔다. 어린 나이에 보부상 점원으로 들어가 경북 일원의 시골 장터를 다니며 장사를 배우고, 기반을 넓힌 그는 40대 무렵에 상주, 김천 칠곡 등 여러 지역에 많은 토지를 사들인 거상으로 성장했다. 1890년 무렵 경상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김보록(로베르) 신부와 인연을 맺으며 선교와 구빈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큰 부자가 됐어도 결코 쌀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던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베풂에는 아낌이 없었다. 친척인 서재필 선생이 1896년 독립협회를 창설한 무렵 은밀히 독립 구국 운동에 참여했다. 대구 본당(현 계산성당) 건립에 주도적 역활을 했으며, 1911년 천주교 대구교구 설정 때 약 3만3천㎡의 땅(현 남산동 교구청 일대)을 희사했다.

 

 

 

 

서상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천주교 창립 시기인 1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던 병인박해 때 삼촌 3명이 순교하는 비극을 맞았다.

 

 

 

 

여행일 20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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