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삼남길 7구간
오산 세마대역에서 도보로 독산성 세마대지 탐방길에 나섰다.
독산성 암문으로 입성,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맡은바 임무를 다했던 이재호(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씨로부터
들었던 독산성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이해를 돕는다.
독산성 암문(暗門)
독산성은 암문을 포함하여 동,서,남,북, 다섯 곳에 문을 두고 있다.
독산성 세마대지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유적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독산성 서문(西門)
독산성 북문(北門)
지적삼각점표지(국가중요시설물)
세마대지(洗馬臺) 오르는 길
누각의 洗馬臺(세마대) 현판은 고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휘호이다.
세마대 전설
독산성은 벌거숭이 바위산으로 물이 부족했다. 왜장이 이런 결점을 눈여겨보고 물 한 지게를 성으로 올려보내며 항복을 요구했다.
권율장군은 굴하지 않고 독산성 높은 곳에 말을 여러 필 데려다 놓고 힌쌀을 부어 씻기는 시늉을 하였다. 이 광경을 올려다 본 왜장은 산성에
물이 부족하지 않다는 속임을 당해 퇴각하였다. 이에 독산성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켜, 말을 씻긴 곳이라는 뜻의 세마대(洗馬臺)라 하였다.
탐방일 2017.06.10.
독산성 세마대지(禿山城 洗馬臺) [사적 140호]
임진왜란 때인 선조 29년(1593)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침범하고 남하함에 따라,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 장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이치에서 왜군을 격파한 후 근왕병(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군사)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독산성은 삼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한양 이남의 병력 이동의 전략적 요충지었기 때문이다. 권율 장군은 이곳에서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왜적의 진로를 차단했다. 당시 허물어진 성은 이듬해 군과 백성이 힘을 모아 불과 4일(9월 11∼14일) 만에 수축하였다. 이 소식은 곧 금지산성(衿之山城)과 월계산성(月溪山城), 여주의 파사산성(婆娑山城)까지 영향을 미쳐 성을 재정비하는 힘이 되었다. 독산성 싸움으로 기세를 올린 권율 장군은 곧이어 지금의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바로 이곳에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독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선조 35년(1602)에 화성부사 변응성이 수축에 나섰다. 정조 16년(1792)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하고, 정조 20년(1796년)에 수원성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였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으로 세마대지는 세마대, 세마산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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