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의 역사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서울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 영릉(英陵)을 조영하였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광주 영릉의 오른쪽 석실에 합장하였다. 세조 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 영릉(英陵) & 영릉(寧陵)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소헌왕후 합장묘 영릉(英陵)
효종대왕(재위 1649∼1659) 인선왕후 합장묘 영릉(寧陵)이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및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세종전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립한 유물전시관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의 전시품은 새로 개관한 세종대왕역사문화관으로 옮겨간 것 같다.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을 알리는 훈민문 앞에서
훈민문 입장을 시작으로 둘러본 순서로 사진 정렬.
홍살문 :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칠 나무문.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신도 : 선왕의 혼령이 출입하는 신성한 길이라는 의미이다. 능을 참배할 때에는 신도로 걷지 않은 것이 원칙이다.
금천교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고 한다.
금천교는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며,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금수교는 1930년대까지는 존재하였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발굴해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신도(중앙로)를 피해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영릉으로 가고 있다.
정자각
영릉 아래에 자리한 정자각은 제례 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례를 드리는 곳이다.
정자각은 좌우측에 층계를 두고 있는데, 제례의식은 동입서출(우측 진입 좌측 퇴출)로 진행된다.
영릉비(英陵碑)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 데, 예종1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와 합장하였다.
영릉비는 영조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 때에 건조되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세종대왕릉 (영릉 英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묘이다. 능 앞에 상석 두 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나타내고 있다.
영릉(英陵) 참배길
능을 앞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올라갔다가 왼쪽으로 내려왔다. 영릉비각(英陵碑閣)과 수복방이 보인다.
수복방은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일종의 관노)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수라간
주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여행일 201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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