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열아홉 살까지 살았던 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본래는 그렁저렁한 초가삼간이었는 데,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하였다. 그뒤 대한제국 광무 7년(1903)에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하였다.
용흥궁(龍興宮) 현판이 붙은 대문 옆으로 행랑채가 있고, 가림막 담장 안의 내전(안채) 마당 끝에 사랑채가 있다.
철종의 잠저 비석과 비각
비석에는 "철종조잠저구지(哲宗朝潛邸舊址)"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哲宗)이 살았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철종(哲宗)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에 있으며, 능호는 예릉(睿陵)이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 : 1831~1863)
조선 헌종(憲宗)이 1849년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6촌 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는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잡고 세도정치를 하면서 왕손들을 하나씩 역모로 몰아 죽었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과 형제들도 피해가지 못하고 차례로 죽어 나갔다. 이에 처하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 유배지에 있던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열아홉 살 이원범을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 제25대 왕(철종 : 재위 1849~1863)위를 이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이뤄 낸 순원왕후의 순발력 있는 조처였다. 철종 즉위 후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妃)로 책봉한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의정부(議政府)의 문란이 극에 달했고, 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갔다.
철종(哲宗)의 어린 시절 이름은 이원범이었다. 그는 한양에서 왕족(사도세자의 직계후손)이라는 귀한 몸으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역모에 연류되어 왕족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강화로 유배돼 농사일과 나무꾼, 행상을 하며 살았다. 그 시절 원범은 양순이라는 처녀와 사랑을 하고 혼인까지 약속했다. 원범은 만인의 왕이 되어서도 강화의 음식과 양순이를 그리워했지만, 김씨 세도정치의 허수아비 왕이었기에 끝내 천민 신분의 양순이를 궁으로 불러들이지 못했다. 철종은 왕에 오른 지 14년 6개월 만에 서른세 살의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양순이는 원범을 잊지 못해 미쳐서 돌아다녔는 데, 궁에서 사람을 보내 죽었다는 설이 있다.
▼ 정기세생모비 & 정원용불망비
용흥궁(龍興宮) 대문 앞에 서 있는 이 비석들은 1864년 3월에 문충공 정원용(1783~1873)과 정시세(1814~1884)의 청렴한 덕행과 백성을 아껴 준 공로와 은혜를 기리고자 강화유수부의 18개 면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여행일 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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