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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 월성위 김한신 묘(墓)

by 오향란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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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영조의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려 정조가 하사한 열녀문이다.

 

 

화순옹주홍문 현판에 새겨진 글

祿

(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라고 판각되어 있다.

 

 

↓ 묘막터

원래 53칸이었다고 하나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는 흔적조차 지워진 주춧돌만 남아 화순옹주의 정절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라 하더라도 묘막을 설치할 수 없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월성위 김한신 묘(墓)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이다.

 

김한신은 1920(숙종 46)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32년(영조 8)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尉)에 봉했졌다.

오위도총부도총관(管), 제용감제조(調) 등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여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썼다.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인보(印寶: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하였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한 살 차이로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지만

26년 간의 삶에 자식이 없었으며, 양자 김이주(형조판서 증 좌찬성 정헌공), 양손자 김노경을 두었다. 

 

여행일 2016.09.03.

 

 영조의 부마 월성위 김한신(1720년 숙종46~1758년 영조34)은 사도세자와의 언쟁 끝에 벼루를 맞고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격분한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죽기를 자처하였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친히 화순옹주를 찾아나서 만류하였으나 화순옹주는 미음을 몇 술 뜨는 듯하다가 모두 토해 내었다. 이를 본 영조는 화순옹주의 결심이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탄식하며 궁궐로 돌아갔고 식음을 전폐한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은 13일 뒤인 1월 17일 38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조정에서는 예로써 월성위 김한신과 함께 부부 합장묘를 만들어 장례를 치러주었고 화순옹주의 정절을 높이 기려 열녀 정려문을 하사하기를 청했으나 정조는 딸이 아버지를 앞질러 죽은 것이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후일 1783년(정조 7)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조카인 정조가 화순옹주의 정절을 추모하는 열녀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을 하사하였다. 영조의 딸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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