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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

무주구천동 탐방. 구천동 숲속을 걷고, 구천동 계곡에 발 담그고

by 오향란 2017.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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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구천동 계곡

 

구천동을 흔히 무주구천동이라고 하는 데, 구천동은 행정구역상 명칭이 아니다

신주소로 주소체계가 바뀌면서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일대에 '구천동로'라는 길 이름이 등장한 정도다

구천동은 조선시대 향적봉기(香積峰記) 라는 기행문에 이곳 깊은 계곡에 14개의 절이 있었으며

심신 깊은 불자가 구천명이나 수도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된 이름(洞)이다.

 

 

제1 인월교

 

이곳에서부터 백련사에 이르는 5.0km구간을 구천동 어사길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 옛 집터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2 인월교

 

구천동수호비(국가보훈처지정현충시설)

 한국전쟁(6.25전쟁) 당시 아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반격을 하여 북진하는 과정에서 유엔군의 인천상록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그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역 대원들이 전사를 하였다. 이들 영혼들은 자손이나 가족이 없으며 분묘도 없이 구천에서 떠도는 것을 구천동수호동지회에서 이곳에 비를 세워 영혼들이 편히 잠들게 하였다.

 

 

이곳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인 데, 사람들을 따르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쨌던 기율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쓴소리를 감수하였지만

나도 참 웃겼던 것 같다. 가이드를 부추겨 끝내 사진 한 컷을 찍고 나왔으니 ㅎ

 

여행일 2017.06.18.

 

 나는 요즘 일찌감치 자가용을 가졌던 것이 후회막급이라고 소리없이 외치고 있다. 만 30년이 넘게 자가용을 몰았는 데, 가여울 정도로 걸어서 갈 거리도 차를 이용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허무하고도 결코 좋은 게 아니었는 데, 왜 일찍이 생각을 못하였는 지, 자가용 30년에 남은 것이 있다면 생에 가장 중요한 건강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아마도 30년 전 처음으로 차를 가졌을 때의 자긍심은 그리고 내 차 남편 차를 구분해 가졌을 때의 자부심은 누구라도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작년 12월 자가용을 없앤다는 결단을 내리면서 잘하는 짓인가 고민도 했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살면서 나를 위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가용을 없애므로 해서 생기는 이로운 점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날들이다. 금전적 이득은 틀림이 없는 것이고, 네비게이션으로부터 벗어나 머리를 쓰게 되고, 보다 걸어야 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확연히 받는다. 그리고 기차를 비롯하여 고속버스, 지하철, 광역버스, 일반버스, 마을버스 등 연결망이 잘 되어 있는 교통수단에 감사를 한다. 특히 차를 갈아탈 때 환승입니다 하는 멘트로 기분을 좋게 하는 대중교통 환승제도가 대단히 고맙다. 나이 육십 중반을 앞에 둔 주부로서 지나간 날의 자가용 30년을 되돌아 볼 때, 처음 10년은 한 발 앞섰던 삶이었을 것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마지막 10년은 애석하게도 손해를 보고 살았던 삶에 지나지 않았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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