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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로마제국에 항거하다 파멸한 유대인의 마사다. 이스라엘 마사다

by 오향란 2018.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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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에서 마지막 이틀 밤을 보냈던 호

 

 

 

 

요르단을 떠나 다시 이스라엘로 이동하는 날이다..

출입국 절차를 고려해서 일정 시간보다 한 시간 빠른 7시에 호텔을 나섰다. 1시간 30 쯤 달려을까

요르단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해 출국심사를 마치고, 이스라엘 출입국사무소로 이동해 입국심사를 순조롭게 마쳤다.

하지만, 전용버스가 오지 않아 무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인솔자가 일찍 서두르는 것에는 염두를 두었지만

미처 이스라엘 쪽에다 통보를 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착으로 입국심사를 마치고도 후발로 입국심사를 마친 외국인들에게 밀리는

속속 케리어를 끌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들 사이로 가는 외국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황금같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야 했다. 

 

 

 

요르단 입국할 때 국경(벳샨)과 다른 국경(킹후세인)을 통해서 이스라엘 땅에 들어섰다.



 

참고

요르단과 이스라엘 양국은 이곳에 놓인 요르단 다리를 국경으로 하고 있는 데

요르단에서는 킹 후세인 국경이라고 이름 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알렌비 국경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 쪽에서 입국을 하느냐에 따라 국경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요르단 킹 후세인 다리 〈〓〉 이스라엘 알렌비 다리)

 

 

 

마사다 요새로 가는 차 안에서 보는 대추야자 숲이다.

척박한 대지 위에 줄 맞춰 서 있는 대추야자가 대견해 보인다.

 

 

 

이스라엘의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다.

군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데, 실탄이 장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을 몰래 찍다 보니 화면이 좋지 못하다.

 

 

 

 

풍요 속에서도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데...

소금이 밭을 이루는 대지에 나무가 푸르름을 키우고 있다.

척박한 대지에서 위대함을 본다.

 

 

 

 

 

유대인의 마지막 요새 마사다(Masada)

 

 

 

마사다 입성에 앞서 우선으로 마사다에 이해를 돕는 영상을 감상했다.

 마사다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영상을 관람한 뒤,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마사다 요새에 오르고 있다. 

 

 

 

사각형 형태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은 로마 군대의 공격 램프 유적이었지 싶다.

마사다 절벽 아래에는 로마군의 공격 램프가 여러 곳에 있다.

 

 

 

유대 광야 저 멀리 사해가 희미하게 굽어 보인다.

 

 

 

케이블카는 뱀길이라고 부르는 구불길 트레킹 코스를 따라 세워졌다.

호기인지 모르지만, 작열하는 태양만 아니라면 걸어서 못오를 것도 없다 싶었다.

마사다 동쪽의 이 뱀길은 옛부터 나 있던 길이라고 한다.

 

 

 

마사다 성벽에 만들어진 이 골은 수로의 하나로 보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마사다 절벽에 길게 놓인 나무다리를 걸어서 뱀문을 통과했다.

마사다 요새에 입성한 것이다. 

 

 

 

마사다 요새 모형

 

 

마사다 요새는 기원전 37년부터 31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반란 세력인 헤롯왕에 의해 세워졌다.

 

 

 

 

돌벽에 검은색 선을 그어 유적의 전후를 표시하고 있다.

검은선 아래 부분은 본래의 것이고, 검은 선 위 부분은 복원된 것이다.

 

 

 

 

 

페허의 창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본다.

화려했던 영광도 치열했던 전쟁도 죽음 앞에 무슨 소용이 있었으리...

남은 세상 그렁저렁 여행이란 것을 통해서 걸을 수 있을 때

더 멀리 보고 걷는 게 최선의 삶이 아닌가 한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방들이 이어진다. 곡물저장실, 병영, 병기고, 등이 있었던 곳이다.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요새 곳곳에 세워져 있다.

 

 

 

 

식량 저장고

수천 명이 몇 년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건축되었다고 한다.

 

 

 

 

공중 목욕탕

 

 

목욕탕 모형

 

 

예나 지금이나 배가 부르면 즐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목욕은 그 충족을 위한 필요 조건의 하나이다.

 

 

 

 

물을 끓여서 뜨겁게 달구고, 이렇게 달궈진 뜨끈뜨끈한 물에서 목욕을 하고 

당시 이곳의 목욕탕은 단지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목욕탕의 ↕  안과 밖. 목욕탕의 불을 지폈던 곳이다.

 

 

 

 

↓ 북쪽 궁전의 모형  

헤롯왕의 여름 궁전으로도 불렀다는 북쪽 궁전은 기원전 25년부터 두 단계에 걸쳐 건축되었다고 한다.

 

 

궁전의 상층부 테라스는 헤롯왕의 중심 공간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반원형으로 건축되었다.

상단의 반원형 테라스와 층을 이루고 있는 중앙과 그 아래 건축물은 연회를 위한 리셉션장이었다고 한다.

층층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서쪽에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북쪽 궁전 상단의 테라스였던 페허의 공간에서 층층을 이뤘던 페허의 리셉션 홀을 내려다 보고 있다.

 

 

 

광범위한 유적군, 발굴은 기약이 없어 보인다.

 

 

 

마사다는 특성을 지닌 석회암 지대로 비가 와도 땅으로 스며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곳곳에 만들어진 저수조에는 수백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욕탕을 운용할 정도로 물이 풍족했다고 한다. 

 

 

↓ 돌더미를 지붕으로 삼고 있는 저수조

 

 

 

돌담 유적의 작은 공간에서 마사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인.

 

 

 

유대인 회당

유대인 회당 상상도

 

 

 

마사다 콜룸바리움 타워

비둘기 집이다. 당시 비둘기는 메신저의 역할을 했으며, 마사다 사람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고 한다.

비둘기 타워 상상도

 

 

 

로마제국의 공성병기 이동로

로마제국은 마사다를 함락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마사다에서 가장 낮은 서쪽 절벽을 겨냥해 공격용 경사로를 만들었다.

로마제국의 마사다 공성 보루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유적이다.

 

 

마사다는 유대인들의 결사 항전의 장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은 훈련을 마치고 퇴소할 때, 이곳에 와서 전의를 다진다고 한다.

 

 

 

 

 

뜨겁다가 아닌 따갑다~ 마사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곳, 작열하는 땡볕을 피할 길이 없는 곳.

강렬한 태양열을 맞으며 무너진 옛 성을 구경하는 것이 고문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마사다는 웅대했을 것으로는 짐작이 되나 아름다웠을지는 의문이다.

 

 

부산 언니가 목에다 티슈 페이퍼를 머풀러처럼 둘러주어 한결 따가움을 견딜 수 있었다.

여행일 2018.05.01.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뒤 유대인들은 마사다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72년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로마군 10군단(로마군 9천명, 유대인 포로 6천명)을 이끌고 마사다를 포위했다. 그리고 동쪽 통로를 이용하여 진입하려 했으나 로마군은 가마득한 성벽 위에서 내려 쏘는 화살과 퍼붓는 뜨거운 물에 맥없이 쓰러졌다. 열 배가 훨씬 넘는 병력으로도 난공불락 요새를 어찌할 수 없어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로마군은 궁리 끝에 가장 낮은 서쪽에 능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유대인 노예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켰다.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동족인 유대인 노예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73년 로마군은 마침내 인공 능선을 만들어 치밀하게 공성전을 펼쳐 마사다를 함락시켰다.

 

 반면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마사다에 있던 967명의 유대인들은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지도자 야이르는 “형제들이여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니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고 외쳤다. 남자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10명씩 조를 정한 뒤 집으로 돌아가 죽은 가족들 곁에 누웠다. 조장들은 집집을 돌며 남자들을 죽였다. 남은 조장들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식량 창고 일부를 남기고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식량이 떨어져 옥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아이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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