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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의 소사원길! 역사를 찾아가는 도보여행

by 오향란 2017.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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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찾아가는 도보여행, 삼남길 제10길 소사원길!

 

평택 굿모닝병원 후문 쪽이다. 이곳에서부터 소사원길 도보여행이 시작되었다.

 

 

 

평택시 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곳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었다.

예전의 소사는 마을 앞에서부터 백리 길인 포승면까지 평야를 이루었다고 해서 소사평야, 소사벌이라고 불렀다. 소사벌은 역사적으로 조선 선조30년(1597) 명나라 군사가 왜장 구로타의 군사를 무찌른 격전지로써 소사벌대첩은 평양성전투, 행주대첩과 함께 왜란 육전3대첩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평택시에서는 문화축제행사로 소사벌 백중놀이를 1985년부터 매년 8-9월에 열고 있다.

 

 

 

대동번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0호]

 효종2년(1651) 승무원 부제조를 거쳐 충청감사로 부임한 김육(1580~1658)이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 등을 점검하고 호서지방(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상소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훗날 김육은 영의정에 올랐고, 효종10년(1659)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지방을 통하는 소사 길목에 비를 세웠다. 대동법시행기념비의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평택시 소사동 원소사 마을에 있는 이 대동법시행기념비는 원래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언덕에 있었으며, 1970년대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원래 대동법은 조선 광해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인조 원년(1623) 강원도, 효종2년(1651) 충청도, 9년(1658) 전라도 해읍, 현종3년(1662) 전라도 산군, 현종7년(1666) 함경도, 숙종4년(1678) 경상도, 34년(1708) 황해도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어, 고종31년(1894) 세제개혁 때 지세(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대동법은 특산물 공납제의 폐단을 없애고 지방의 대소 구분없이 토지 결수에  기준하여 부과 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지역 실정을 고려한 미곡과 무명 등으로 환산하여 납부하는 납세제도이다. 대동법 시행 후 공부(貢賦)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이 줄어들었고 민간의 상거래도 원활해졌다.

 

 

 

 

 

어쩜 대동법시행기념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 소사동석조보살입상

원소사 마을 대동법시행기념비 근방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이 불상은 마모가 심해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땅히 찾아갈 곳도 반가이 맞아주는 이도 없는 내 고향 평택!

그러나 누군가는 나를 어쩌다 그리워하지 않을까 싶은 내 고향 평택!

 

 

 

도시화가 된 옛길, 걷는 길 디에서도 흙길의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다리생태공원을 왼쪽 옆으로 하고 걷고 있다.

 

 

 

 

 

 

 

 

 

봉지를 입은 배가 주렁주렁! 내 고향 평택은 배가 유명했지...

평택에 배를 처음으로 재배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전후로 일본인들이 비전동 옛 구릉지를 개간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 부근 식당에서 연잎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연잎밥은 집에서도 곧잘 해먹는 편으로 식당의 연잎밥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난이도가 중하라고 하는 소사길이 끝간 데를 모른다.

구간 거리가 꽤 긴 편이지만, 특별히 산길이나 언덕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난이도가 높지 않다는 소사길이 나를 이리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옛길 걷기 담당자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졌다.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싶지만 마음이 짠했다.

블로그를 통해서나마, 옛길을 찾아내고 다듬고 하는 문화재단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매번 옛길 걷기를 함께해 주고 있는 경기옛길 상냥한 여성 담당자들에게 참 고마움을 표한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나 웃고 있는 거니...

더위야 나 살려라~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잔디밭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더위를 식혔다.

 

 

 

올들어 가장 무더운 날씨가 아니었나 싶다.

걷고 싶어 걷는다지만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덥고 습하고 힘든 길이었다.

 

 

 

 

 

폭염과 씨름을 하며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칠원동 옥관자정에 마침내 도착해 스탬프를 꾹 눌러 찍었다.

칠원동은 원칠원과 새말(신촌), 수촌, 쇠물뿌리 마을로 이뤄졌으며, 갈원, 갈왕골, 갈왕굴이라고도 불렀다.

칡 갈자를 쓰는 갈원(葛院)의 명칭은 칡이 무성했음이며, 평택시가 통합되기 전에는 송탄시에 속했다.

 

 

 

 

원칠원(칠원동) 옥관자정

조선 제16대 인조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을 가던 중 이곳 갈원(葛院)에서 쉬게 되었는 데, 샘물 맛에 감탄하여 옥관자를 내렸다고 한다.

1971년 5월 15일 대한민국 제6대 박정희 대통령께서 전국새마을 가꾸기 사업용으로 내린 시멘트로 지금의 옥관자정을 마련했다.

옥관자 : 조선시대 당상의 관원들이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고리 장신구를 말하는 것으로 권자라고도 한다.

 

 

옥관자정 옆에 숨은 듯 서 있는 표석

평택시 칠원동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농촌 새마을운동의 상징적 유산 마을이다. 하지만 당시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던 김기호 씨가 사망을 하였고, 다양한 기록들도 대부분 흩어져 그 시절의 흔적을 찾기란 쉬지 않다. 그나마 김기호 씨가 자서전을 남겨 전말을 기록하였고, 옥관자정 옆에 표석을 세워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새마을운동의 기인과 칠원동(원칠원) 주민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전하고 있음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삼남길의 소사원길 도보여행 2017.07.22.

 

 평택시 칠원동은 조선시대에 갈원(葛院)으로 불렸던 곳으로 갈원은 국가에서 관원의 출장 때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을 두었던 곳으로 삼남대로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묵어가는 삼남대로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1번 국도가 삼남대로를 비켜가면서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낙후된 삼남대로변의 주막거리 마을로 남아 괄시를 받기도 했다. 농사 지을 경작지 부족과 농업용수의 부족으로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해다 팔거나 밭농사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오랜 세월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그러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1960년 대에 귀농정착 사업장에 하동환자동차(현 쌍용자동차) 공장이 들어서고 농촌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부터였다. 칠원1동(원칠원)은 농촌 새마을운동 시범마을이었다. 1950년대부터 소년단운동 등을 전개했던 마을지도자 김기호 씨의 열정적인 주도로 마을 주민들은 새마을운동에서 가난을 벗어날 희망을 보았다. 1970년대 주택이 개량되고, 마을길이 넓혀지고, 퇴비증산으로 토질이 개선되었다. 당시 축산업은 소 한 마리에서 논 열마지기 소출이 나온다고 할 만큼 소득이 높았다. 마을공동사업으로 이태리포플러 묘목사업과 향부자 재배사업을 하여 소득을 높인 것도 이때다. 경기도에서 가장 가난했던 마을이 새마을운동으로 환골탈태하여 평택시 시범마을로, 경기도 시범마을로, 전국 시범마을로 지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 유명 인사들이 칠원동 마을을 방문 시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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