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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곳. 베론성지!

by 오향란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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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론성지의 베론은 첩첩산중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과 비슷하다 해서 붙혀진 명칭이며

1911년 경성교구에 속했다가 1968년 원주교구에 속하였고 1970년 대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베론성지를 세로질러 흐르는 개울 우측으로 성요셉성당, 십자가의길, 순교자의집, 신학당, 황사영백서토굴이 있고

개울 좌측으로 최양업신부 기념성당(대성당),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로사리오의길, 대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배론 신학교(충북지방문화재118호)

본래 신학교 건물은 6.25 때 소실되었고, 2003년 정규하 신부와 배론 교우들의 고증으로 복원하였다.

 

배론 신학교 건물은 본래 장주기(요셉) 성인이 살던 집이었으며, 기증에 의해 1856년(철종 7)에 프랑스 신부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교(성요셉신학교)를 설립, 신학생을 양성하였다. 1836년에는 조선 최초로 신학생 3인(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으며, 조선 최초의 김대건 신부, 두 번쨰 최양업 신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대원군의 천주교 말살 정책(병인박해)으로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1930년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배론 교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복원된 신학교 벽에 걸려 있다.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하면서 생계를 위해 토기를 굽던 가마터

 

 

 

황사영 순교 현양탑

현양탑 앞에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동상이 세워져 있다.

 

 황사영은 1795년 주문모(중국) 신부를 만난 뒤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황사영은 16세 때 장원급제할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해 살면서 신자와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번역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1752~1801)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는 1802년(순조 2) 2월 신유박해를 피해 베론으로 와 기 저장고를 위장한 토굴 속에 8개월간 은신해 있으면서 9월 22일 백서를 완성했다. 백서는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 당했다. 천주교인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황사영은 그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처형되었다.

 

 황서영 백서 토굴

현재의 토굴은 1987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의 고중에 의거하여 복원되었다.

 

 

황사영 백서 복사본

백서는 비단에 쓴 것으로 1925년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 신유박해 과정, 순교자, 교화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관면 요청, 맺음말을 적고 있다.

 

 

 

순교자들의 집(피정의 집)

 

 

 

최양업(도마)신부 기념성당(대성당)

대성당과 소성당이 붙어지어졌으며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도 했다.

 

대성당 내부

 

 

소성당 내부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배론성지 산 중턱에 1861년 순교한 최양업(1821-1861년) 신부님 묘가 조성되어 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에 이은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이다.

최양업 신부님 일대기가 중앙의 제대 뒤쪽에 병풍 형태로 조각되었다.

 

 

 

 

 

인생여정에는 지름길이 없다!

인생길은 순례의 길 서두르지 말자!

 

 

인생여정을 묵상하는 미로 

여행일 201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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