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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 공산성(公山城)

by 오향란 2018.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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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

 

공주 공산성은 본래 백제시대 때 축조된 도읍지 산성으로 백제의 웅진성이었다.

고려시대 때 공산성으로 개명되었고, 백제 문주왕 1년(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고, 성왕 16년(538년)에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할 때까지 5대에 걸친 64년간 백제를 수호했다.

2015년 7월, 송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공주 공산성 비석군

공주 곳곳에 있던 공주 관련 비석들을 금서루 아래 진입로에 모아 세운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공산성 금서루

공주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금서루를 통해 공산성에 입성!

 

 

저 만치에 금강과 마주한 공북루가 보인다.

 

 

 

공산성 쌍수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

1734년(영조10)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의 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우고 쌍수정이라 하다.

 

 

쌍수정은 인조와 시름을 함께 한, 두 그루의 거목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정자로써

인조는 즉위한지 1년도 안되어 이괄이 난(1624년)을 일으켜 공산성으로 피난을 와 6일간 머물렀으며 

시름의 나날을 두 그루의 에 기대서 달랬곤 했는 데, 반란군이 완전히 토벌됐다는 소식을 듣고

두 거목이 버팀목이었다 하여, 두 거목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주었다고 한다.

 

 

 

 

쌍수정 사적비(유형문화재 제35호)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각.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 공산성 추정 왕궁지 

 

 

 

백제시대 목곽고

목곽고는 식품이나 물품 등을 저장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을 일컫는다.

 

 

 

인공 연못

빗물을 저장하여 연못으로도 사용하고, 화재가 났을 때 소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공산성 영은사(靈隱寺)

영은사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했던 곳으로

인조는 이 절이 국방의 요지임을 깨닫고 승병을 계속 주둔하게 하였다.

세조 때 묘은사()라 하였으며, 인조 때 영은사로 고쳤다.

 

 

 

공복루 암문

영은사 앞쪽에 있는 이 암문은 비상시 성 출입을 위한 비밀 통로로 금강을 향해 있다. (길이 10.23m, 높이 1.67m)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금강의 경승을 즐길 수 있는 누각으로 1984년 복원되었다.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석빙고

한겨울 꽁꽁 언 금강의 얼음왕겨에 싸서 이 석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꺼내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누에의 일을 보관해주는 잠종 저온창고로도 사용되었다.

 

 

공산성은 금강을 북쪽에 두고 해발 110m에 능선 계곡을 따라 흙으로 축조된

포곡형 산성으로, 성곽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성벽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공산성 성곽의 총 길이는 2천660m이다.

 

 

 

 

공북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으로, 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공복루 아래는 금강에서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안무정(按舞亭)

고려시대의 안렴사가 금강의 물줄기와 산세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고 전해지는 곳.

 

 

 

여행일 201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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